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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사네티, 졸라> 영구 결번을 소유한 축구선수 2편!

by 나초미쵸 2020. 4. 3.

하비에르 사네티 (인터 밀란, NO. 4)

"인테르 팬들이여,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오랜 기간 없다고 상심하지 말라. 그대들에겐 그 어느 우승컵보다도 빛나고 위대한 주장이 있지 않는가." - 프란츠 바켄바우워

 

하비에르 사네티

 

하비에르 사네티는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인터밀란에서 약 20년 동안 뛰었습니다. 사네티는 인터밀란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언급되며 현재는 구단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사네티는 19살에 아르헨티나 리그 소속 프로 축구 선수로 데뷔했습니다. 그는 5년 정도 아르헨티나에서 프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가 그를 눈여겨보던 인테르의 구단주에 의해 1995년, 이탈리아 땅을 밟게 됩니다.

 

사네티는 입단 초기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라운드에서 혹독한 훈련의 결과물을 보여줘 팬들의 사랑과 인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테르는 1997/98 시즌 UEFA컵 결승전, 라치오를 만나 3-0 대승을 거두어 UEFA컵 3번째 우승 트로피를 맞이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사네티는 결승골을 넣어 팀의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사네티는 본의 아니게 '우승'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1998/99~2002/03 시즌 세리에 A는 일명 '7공주 시대'로 불리며 세리에 A판 춘추전국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인테르는 호나우두, 비에리, 블랑, 사네티 등 엄청난 선수들이 명성을 떨쳤지만, 주전 공격수들의 빈번한 부상 소식에 인테르는 우승 경쟁 레이스에 뛰어들지도 못했습니다.

 

사네티는 팀 성적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모라티 구단주의 간절한 만류에 팀에 끝까지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2006년, '칼초폴리'가 이탈리아 축구계를 덮쳤습니다. 칼초폴리는 이른바 '축구 게이트'로 유벤투스, 레지나 칼초, 라치오, 피오렌티나, AC 밀란 등 여러 구단의 승부조작 사건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구단들은 승점 박탈 및 강등 처벌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나비효과로 인테르는 리그를 독주했고, 우승을 갈망했던 사네티는 이적 이래 첫 세리에 A 우승을 맛봤습니다. 이후에도 그의 인테르는 승승장구했으며 2009/10 시즌에는 무리뉴 감독 지휘 아래 정규 리그, 챔피언스리그, 리그 컵을 모두 박살 내며 '트레블'을 달성했습니다.

 

사네티는 40대가 넘어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팀에 큰 보탬이 되었으며, 2014년 더 이상 축구선수로서 연명할 수 없는 몸상태에 이르자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그는 인테르 역사상 최다 출장, 최다 트로피 수상, 세리에 A 외국인 최다 출장, 외국인 최고령 출장,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경기 주장 역임 등 '최다'관련 부문은 대부분 갈아치웠습니다.

 

사네티는 꾸준함의 대명사로 스피드, 몸싸움, 대인 수비, 전술 이해도 등을 두루 갖춘 완성형 풀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동료 선수들을 본인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 자리를 갖는 등의 사교 모임을 통해 그들과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리고 인테르는 200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마이콘이 오른쪽 풀백을 담당했는데, 이때 사네티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에 성공하면서 마이콘이 오버래핑할 때면 그 공간을 잘 커버해줬습니다. 

 

사네티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를 몇 가지 꼽자면, 매년 연봉의 30~40% 기부, 자신의 에이전트가 팀을 곤란하게 하자 직접 해고, 빙결 및 국가대표 차출을 제외하고 팀 훈련 불참 횟수 0회. 등이 있습니다.

 

 

●7공주 시대?

98/99~ 02/03 시즌 유벤투스 AC 밀란, 인터 밀란, AS 로마, 라치오, 파르마, 피오렌티나가 극강의 세리에 A 7강 체제를 이룬 데에서 비롯된 말. 하지만 피오렌티나의 파산, 칼초폴리의 발발로 세리에 A 전체가 흔들리면서, 결국 이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됨.

 

 

지안프랑코 졸라 (첼시, NO. 25)

PK를 득점했다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축했단 것은 모든 이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 지안프랑코 졸라

 

지안프랑코 졸라

 

지안프랑코 졸라는 이탈리아 출생으로 영구 결번을 배정받은 첼시에서 약 8년 간 머물렀습니다. 그는 첼시에 있는 동안 라이언 긱스, 데니스 베르캄프, 로비 파울러, 앨런 시어러 등 90년대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공격수들과 함께 족적을 남겼습니다.

 

졸라는 세리에 C  소속 뉴오레세에서 데뷔한 뒤 토레스로 이적해 팀을 2부 리그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는 168cm, 68kg로 왜소한 체구였지만 그는 잠재성을 인정받아 나폴리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당시 나폴리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었고, 졸라는 그와 일거수일투족 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며, 특히 마라도나의 프리킥을 직접 전수받아 한때 세리에 A 프리킥 최대 골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에 파르마로 이적해 경기당 0.5골을 쏘아 올리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 UEFA 슈퍼컵과 UEFA컵 우승 타이틀을 따냅니다.

 

졸라는 나폴리와 파르마에서 5시즌 동안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세계에서 알아주는 공격수로 각광받았습니다. 이후 1996/97 시즌 졸라는 3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4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남기고 첼시로 떠났습니다. 그는 첫 시즌부터 대활약, 연말에는 '기자단 선정 EPL 올해의 선수상'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는 당시 '뻥글랜드'의 본거지였던 프리미어리그의 수준 향상에 일조했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졸라는 첼시에서 FA컵, UEFA 위너스컵 등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2002/03 시즌 30대 중반이 훌쩍 넘은 그였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 리그 14골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현역 막바지, 졸라는 가족의 안위를 고려해 고향 이탈리아의 칼리아리에 이적했습니다. 한편, 첼시는 러시아 석유 재벌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주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졸라를 그리워한 팬들은 아브라모비치에게 졸라를 다시 복귀시켜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구단주는 팬들의 성원에 따라 그를 복귀시킬 계획에 착수했고 그에게 거액의 금액을 제시했으나 졸라는 단칼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칼리아리를 인수한다면 첼시로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현재 팀에 남겠습니다."

 

결국 졸라는 칼리아리에 계속 잔류하면서 리그 13골을 넣었고 세리에 B에 있던 칼리아리를 세리에 A로 승격시켰습니다. 다음 시즌 그는 9골을 넣으며 나이를 무색할만한 기량을 뽐냈고, 2005년 불혹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졸라는 '판타지스타' 그 자체였으며 톡톡 튀는 드리블과 강력한 슈팅으로 상대 수비와 골키퍼를 당황케 했습니다. 그는 주로 중앙 1.5선에서 경기를 뛰었고 때로는 좌우 측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프리킥 마스터'로 알려져 있는데 가끔 페널티킬을 실축할 때는 차라리 프리킥을 차고 싶다고 할 정도로 프리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졸라 현역 시절 포지션

 

첼시 레전드 존 테리가 현역 시절 등번호 26번을 고집했던 일화를 소개하자면, 그는 우상 졸라를 뛰어넘고 싶은 마음에 졸라의 등번호 25번 바로 다음인 26번을 첼시 시절 내내 입었습니다. 그리고 선수 황혼기에 아스톤 빌라로 이적할 때도 같은 번호를 선택해 졸라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사진=goal.com, transmarkt.com, fifa.com

 

-1편 다시 보기-

https://chukaremott.tistory.com/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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