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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축구 소식

'플라잉 더치맨' 요한 크루이프 사망 4주기.. 그가 축구계에 남긴 5가지

by 나초미쵸 2020. 3. 25.

"The Man Who Reinvented Barcelona"

이 말은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남긴 감독 10명을 선정했을 때 요한 크루이프에게 남긴 말입니다. 크루이프는 축구계에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자, 감독입니다. 그런 그가 4년 전 폐암으로 향년 68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에는 축구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도 애도의 물결을 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을 마감한 지 4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가 축구 역사에 남긴 다섯 가지의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상징성의 대가

'14'라는 숫자는 그의 아약스 시절부터 네덜란드 대표팀까지 함께했던, 마치 전설 같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14가 그의 상징과도 같게 된 것은 단순한 해프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축구가 전반적으로 성행했을 때, 모든 선수들은 본인들의 백넘버가 1에서 11 사이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스트라이커의 상징인 9번에 대한 왠지 모를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소속팀 아약스는 PSV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그의 팀 동료였던 제리 무히렌은 경기 전 자신의 7번 셔츠를 어디에 두었는지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크루이프는 자신의 셔츠를 기꺼이 그에게 내주었고 자신은 여분의 셔츠를 넣어두는 박스에서 아무거나 골라 입었습니다.

 

그는 그 유니폼을 입고, 해당 경기에서 대활약해 그날 이후로 줄곧 그 유니폼 뒤에 적혀있던 백넘버를 고수하게 됩니다. 그 숫자가 바로 14번이었고, 2007년 아약스는 14번을 영구 결번해 크루이프에 대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가 은퇴하고 나서, 많은 축구 선수들이 14번을 선호했는데 대표적인 선수로 티에리 앙리가 있습니다.

 

 

 

크루이프 턴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요한 크루이프는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기억될 만한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스웨덴 수비수 얀 올슨은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크루이프를 단단히 마크하고 있었습니다. 크루이프는 올슨을 등 진 상황에서 오른발로 공을 드래그하며 수비수와 공 사이에 간격을 만들고 , 순식간에 180˚ 터닝 동작으로 올손을 가볍게 제쳤습니다. 이는 오늘날 '크루이프 턴'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그의 턴 동작은 많은 선수들의 귀감이 됩니다. 국내에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안정환 선수의 '안느 턴'으로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바가 있습니다.

 

20세기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총 사령관

크루이프는 엄청난 재능을 인정받아 정식적인 입단 테스트도 없이, 그의 열 번째 생일에 아약스에 입단했습니다. 그는 프로 선수로 데뷔하자마자 급부상하여 1966년 그의 인생 첫 리그 우승 타이틀을 쟁취했습니다. 아약스는 다음 시즌에도 에레디비시를 우승했고, 동시에 크루이프는 33골이라는 엄청난 퍼포먼스로 리그 득점왕까지 싹쓸이했습니다.

 

이로써 아약스는 황금기를 맞이했고 크루이프는 리누스 미셀의 걸작 '토탈 풋볼'의 꼭짓점을 맡았습니다. 아약스에서 활동할 동안, 그는 6번의 리그 우승, 3번의 유로피안 컵(현 챔피언스리그) 우승, 2번의 UEFA 슈퍼 컵 우승을 만끽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1971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해 네덜란드인 최초로 발롱도르를 거머쥔 선수가 되었습니다.

 

 

 

크루이프는 또한 지금까지 조직된 네덜란드 대표팀 중 가장 큰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토탈 풋볼에 힘입어, 네덜란드 대표팀은 1974년 월드컵에서 세계를 강타했고, 그 과정에서 거대한 두 개의 장벽과 같았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꺾었습니다.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와 디팬딩 챔피언 브라질에게 각각 한 골씩 넣었습니다. 네덜란드는 결승전에 올랐지만 결승전에서 서독에 패했습니다. 팀의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는 월드컵 MVP로 뽑혔습니다.

 

라 마시아

요한 크루이프는 1973년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와서 곧바로 카탈루냐인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카탈루냐 인들이 겪은 모든 일에 공감했고, 그들에게 축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센세이셔널한 선수로서 바르셀로나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팀의 운영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바르셀로나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들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재능을 사들이는 대신에 재능을 생산하고 육성하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크루이프의 목표는 클럽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어린 선수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고 이는 축구의 본질 그 이상이었습니다.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 축구에 가치와 철학을 주입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클럽 수뇌부들로부터 받아들여졌고 그 위대한 프로젝트는 라 마시아(농장)라고 명명되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프 누 옆에 있는 농가에 선수들이 머무를 숙소와 훈련장을 지었고 이들은 이를 역사라고 불렀습니다.

 

크루이프가 고안한 이 철학은 21세기 위대한 선수들을 배출해냈습니다. 리오넬 메시,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카를로스 푸욜, 세르히오 부스케츠, 헤라르드 피케 등 모두 바르셀로나를 넘어 세계적인 선수들로 각인되어있습니다. 크루이프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들을 한 자리에서 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토탈 풋볼

 

 

아마도 현대 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은 크루이프의 스승인 리누스 미셸의 지도 하에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미켈스의 축구 철학은 팀의 약점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필드 플레이어들은 주어진 아무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어야 했고 크루이프는 그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습니다.

 

선수들은 단지 공이 자신들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축구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상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는 우리에게 '조직적인 혼란'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토탈 풋볼은 현대 축구에 들어와서 많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전방 압박을 비롯한 여러 전술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R.I.P

 

사진=time, nssmag, backpagefootball, sportbible, gfy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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